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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24. <부정공>보사원종공신가의대부삼도통제사겸경상좌도수군절도사공휘이중행장(保社原從功臣嘉義大夫三道統制使兼慶尚左道水軍節度使公諱爾重行狀)
1. 문헌 목록 〉14. 14世 〉26. <부정공>통훈대부행운산군수공휘하형묘지명(通訓大夫行雲山郡守公諱夏亨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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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부정공>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공휘이정행장(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公諱爾鼎行狀)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公諱爾鼎行狀 公諱爾鼎字重卿護軍公之第一男也生於 仁祖乙亥容秀而晳性仁而寬對之和氣藹然實有成德君子之氣像守拙靜居罕與人接若夫内行純美人有所未盡知者而最篤於人倫事父母盡其誠孝友兄弟極其湛樂親無遠近而必一視其敦睦人無疏切而輒待之以誠信先妣嘗有疾晝夜不解衣帶凡所扶護醫治之方靡不用極而一日先妣病劇昏絶斷指和藥以進既絶而復蘇公之妹在鄉未及省覲其翼日始至先妣乃曰吾今日得延一日之命母子相訣更無遺恨後三日竟至不諱公哀毀哭擗感動傍人葬祭一遵家禮人莫不稱以至孝非得於性者出天而過人則烏能如是至於文藝之家亦嘗致力焉遂以文著稱而筆法尤爲精妙今其遺墨爲人寶藏居家不事產業甔石屢空處之怡然每以和愉淡泊爲主嘗有一鄉族爲親求藥家中蕭然無以應其求時適當食即以盤上飯孟出付家僮轉貨藥局而送之睦族急人之義頗多如是盖公之子侄文學若將大顯于世而自先妣喪三年之内柴毀無餘喪制甫訖以其翊年易簀是在庚申十二月二十五日也享年四十六而卒無所成就屯村老峯諸老皆以爲善人云亡嗟惜不得施於世焉葬于高陽大哉洞先塋之側酉坐之原配延安李氏判中樞文康公石亨之六代孫觀察使天基之女執婦道甚和順事舅姑奉先祀必致誠意克稱公孝思睦姻宗黨無不承公之志一家稱焉 肅宗丙寅二月二十九日卒享年五十四祔葬于公墓有二男三女錄在譜中公歿後五十一年庚戌長孫彦臣由文科爲二品職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淑夫人 不肖孫 彦臣 謹錄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공행장(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公行狀) 공의 휘는 이정(爾鼎)이요, 자는 중경(重卿)이며 호군공(護軍公)의 제一남으로 인조(仁祖) 을해(一六三六)년에 출생하였다. 공은 용모가 수려하고 두뇌가 명석하며 성질이 어질고 너그러워 사람을 대하면 화기가 많아 덕을 이룬 군자의 기상이 있었으며 옹용함을 지켜 한가히 지냈으나 사람들과 더불어 상종함이 적었고 무릇 행의가 순미(純美)하되 방인(傍人)이 다 알지 못한 바가 있고 인륜(人倫)에 독실하여 성효(誠孝)를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로써 그 담락을 다하며, 멀고 가까운 친척이 없이 반드시 한결같이 돈목하고 소원(疏遠)한 사람이 없이 문득 만나면 성신(誠信)으로써 접대하였다. 모친이 병환이 나매 밤낮으로 의대(衣帶)를 풀지 아니하고 간호와 치료의 도리에 정성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선비의 병환이 위독하여 혼절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약에 섞어 드리니 혼절한 목숨이 다시 소생하였다. 다음날 시골 사는 공의 누이가 근친(覲親)을 오니 선비가 말씀하시되 『내가 오늘 하루 수명의 연장을 얻어 모녀가 서로 영결(永訣)하니 다시는 유한이 없다.』 하시었다. 후삼일에 마침내 선비가 별세하시니 공이 가슴을 두드리고 슬피 우니 이에 방인이 다 감동하였다. 또 장사와 제사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라 준행하므로 지극한 효자라 칭찬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출천한 효성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으리오. 문예(文藝)에 정진하여 문학으로 일찍 유명하였고 글씨에 더욱 정묘하였는데 그 유묵(遺墨)을 부자집에서 사다가 진보(眞寶)로 수장(收藏)하기에 이르렀다. 거가(居家)에 산업을 일삼치 아니하여 쌀 독이 비어도 태연히 처신하고 항상 욕심이 없이 화열담박(和悦淡泊)하였다. 일찍 한고을 사람이 어버이를 위하여 약을 구하는데 집안이 궁핍하여 그 구하는 것을 도울 수가 없었는데 때마침 식사 때라 밥상 위에 있는 그릇을 노비에게 팔도록 하여 약을 구해 보내는 등 일가간에 화목하고 궁한 사람을 구휼한 의리가 이렇듯 아름다웠다. 대개 공의 문학이 장차 크게 현양(顯揚)할 것인데 선비상 三년동안에 몸이 무척이나 수척하게 되어 탈상 다음 해에 향년 四十六세로 마침내 성취(成就)한 것 없이 별세하니 이 해가 경신(庚申)년 十二월 二十五일이었다. 둔촌(屯村)·노봉(老峯)·제로(諸老)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착한 사람이 갔다 하고, 또 세상에 그의 학문을 나타내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기었다. 고양 대재동 선영 아래 유좌언덕에 안장하였다. 배는 연안이씨 판중추 문강공 석형의 육대손인 관찰사 천기의 따님으로 부도(婦道)가 심히 화순하여 성의를 다하여 시부모를 섬기고 선영을 받드니 능히 공의 효도를 짝하였고 종족간에 화목 또한 공의 뜻을 따라 어김이 없으니 향당이 칭송하였다. 숙종(肅宗) 병인(一六八六)년 二월 二十九일에 향년 五十四세로 별세하여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二남 三녀를 두어 보첩에 등재되었다. 공이 별세한 후 五十一년 되는 경술(庚戌)에 장손(長孫) 언신(彦臣)이 문과(文科)에 올라 二품직이 되므로 공에게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 참찬관을 추증하고 비는 숙부인으로 추봉하였다. 불초손 언신(彦臣)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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